나는 1944년 전남 어느 작은 농촌마을에서 10남매 중 10번째 늦둥이로 태어났다
언니들은 우물에 물 길러 가서 "느그 엄니 또 애기 뱄드라 잉?" 하는 소리 듣는 것이 제일 창피했다고 했다. 엄마 또한 큰아들 며느리 앞에 만삭 된 배가 남사스러워 "왜 또 들어섰느냐?" 며 죄 없는 배를 수시로 쥐어 박으셨 노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지금 같았음? "엄마아빠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내가 저절로 생겼냐? 그 나이에 엄마아빠는 9명이나 되는 자식들 기르랴 농사지으랴 언제 사고 칠 틈이 있었냐? 사고는 엄마 아빠가 치고 죄 없는 나를 왜 쥐어박았냐? 뱃속에서 곱게 자랐으면 윤정희처럼 이뻤을지도 모르는 내 얼굴이 시도때도 없이 쥐어 박혀서 이렇게 앞뒤꼭지 삼천리가 되지 않았냐?" 고 펄펄 뛰겠지만 그 시절의 자식들은 그저 태어나서 죄송할 뿐이었다 옆동네로 시집간 큰딸이 줄줄이 셋을 낳는 동안 엄마 또한 줄줄이 셋을 더 낳아 한죽 (열명)을 채우시느라 딸보다 일 년 늦게 단산하셔서 자라면서 주변 어른들로부터 "딸 막둥이가 엄마 막둥이 보다 한 살 위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먼 소리야?" 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딸보다 늦게 까지 애를 낳고있는 희귀한 현상이니 애깃거리가 될만도 했다고 격하게 공감하고 있다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주면서 "할머니 서울서 편지 왔오" 해서 "왜 우리 엄니를 할머니라고 불르요?! 했더니 "음마? 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제 그람 멋이라고 불른다냐?" 라고 해서 평소에 멀리서 슬쩍 보이기만해도 반갑고 이쁘던 우체부 아저씨를 그날부로 미워하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런 형편이니 당연히 나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학구열이 높아 진학에 대한 열망이 높았으나 돈이 없었다 그 당시 외국에서 국비로 유학을 마치고 물리학 박사로 귀국해 서울대학 교수에 취업하게 된 셋째 오빠는 장래가 촉망된 젊은 물리 학자였으나 가난해서 동생의 장래는 관심밖 일이었다 더해서 내 존재 자체를 터놓고 거추장스러워 했으므로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의 존재를 미안 해 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경희 대학 시간강사도 뛰었는데 꼭 촌년 나한테 강의료를 받아오게 해서 더 깊은 절망감을 나에게 안겨줬다 대학교 다니는 여대생들 속에 돈주는 건물 물어물어 찾아가는 식모인 나! 나의 존재가 저주스러워 연기처럼 조용히 없어질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를 많이도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동안 우리의 셋째 오빠는? 서울에서도 최고인 서울 대학교를 다녀서 온가족이 일 년 내내 등록금을 위해 길쌈하고 소기르고 돼지 길르고 농사지어 목돈을 만들어야 할 목표였고 보람였다 또한 착하고 자상하고 잘생겨서 남들한테는 이쁜 아들로 통했고 엄마는 늘 "우리 ㅇㅇ 는 한 번도 혼낼 일을 안 하고 자랐다!" 라고 자랑하셨던 아들이었다 겨울 방학 때면 륙색에 한가득 빨랫감을 메고 와서 바로 아래 여동생 언니가 방죽물 살어름을 방망이로 깨고 빨갛게 언 손 후후 불어가며 빨아야 하는 것 마저도 행복으로 알고 기다리게 했던 오빠 여름 방학 이면 밤마다 마당 평상에 앉아 우리에게 캔터키 옛집 같은 노래도 가르쳐주고 신식 명작소설 이야기도 들려주며 "우리 막둥이는 오빠가 고등학교도 보내주고 대학교도 보내줘서 우리 동네서 첫 여자 대학 출신이 나오게 해 주겠다" 약속했던 자상한 오빠였다 유학 중에도 엄마한테 보낸 편지마다 " 막둥이 장래는 내가 책임질 테니 어머님은 걱정 마시라. 나한테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오빠가 돌아와서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보내서 학교 선생님 만들어주겠다 고 도 약속하던 다정했던 아들였고 오빠였는데? 그 오빠는 어디 가고 지금은 하늘 같은 서울대학 교수님 오빠와 부잣집 딸 올케 그리고 나랑은 근본이 다른 조카 둘 만 저 높은 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시절 이문열 님의 '사람의 아들'이란책에서 잉여인간이란 대목을 읽고는 나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생각하며 밤마다 소리 죽여 울었고 소리 내지 않고 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때 알았다 덕분에 살면서 안좋은 일은 그때와 비교 해서 더 가볍게 좋은 일은 더 크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고 순간순간을 나도 잉여인간이 아닌, 귀중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새기며 살게도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빠의 주선으로 개인회사에 취직 하게 됐다 이력서는 당연히 오빠가 고졸로 작성했고 오빠의 지위로 동생의 고졸 학력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나 또한 제법 똑똑해서 일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중학교라도 나온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며 힘들게 중학교 까지 졸업 시켜준 엄마가 무한 고맙기도 했다.우리 동네서 내또래중 중학교 간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성실히 일 했더니 인정도 받아 중요한 업무도 맡게 됐고 수입도 높아져서 집안에서 의 신분도 시나브로 상승해 겉으로는 오빠네 가족의 일원 에 걸맞아 보였다 하지만 가족 외 존재라는 근본적인 경계만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올케는 그 점에서 무척 꼼꼼했으니까. 애초에 촌에 있는 나를 불러올린 것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올케가 임신을 했는데 자궁이 약해서 임신 유지가 어려워 적극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있어 식모가 필요해 나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제 오빠의 뇌리에서 나와의 약속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더라도? 오빠 덕에 중졸의 학력으로 당당한 직장인이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지금까지 해로하고 있으니 오빠 덕을 크게 봤다는 생각은 하면서 살고 있다 결혼 후 학력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살던 사십 대 중반의 어느 날 구역예배 중 캐나다 이민을 추진 중인 어느 한 교우가 "라이선스가 있으면~~~"라고 말하는데 나도 몰래 "라이선스가 뭐야?"라 묻고야 말았다 "아차! 몰라도 아는척 가만이나 있지! 가만있으면 중간인데?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고졸인데?" 역시나 살아온 바탕은 어쩔 수가 없어 보였다 그동안은 꾸준히 신문도 꼼꼼하게 읽고 남들처럼 살면 보통은 될 줄 알고 살았는데? 그걸로는 안되는 커다란 공란이 있어보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업그레이드 시킬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하고 "영어를 배우자"로 결정했다 신문광고 란을 뒤져 신설동 수도학원을 즉시 찾아갔다 "그래!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영어 몇 마디씩 하실 때 얼마나 멋져 보였고 유식해 보였던가? 흐흐흐! 아~ 이 반짝이는 나의 영민함이여! 스스로에 감동하며 곧바로 어머니 회화 반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왕복 두 시간. 투자한 시간과 차비가 아까우니 회화반 단어반 팝송반까지 세 타임씩 들으면서 열심히 따라갔다 그때 타임당 수강료가 7만원여서 세타임이면 21만 원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다 팝송반 수업 때는 선생님이 수업 중간에 오래 다닌 사람 중에 "ㅇㅇ 님 나오셔서 한번 불러보세요"라고 지명하시는데 매번 노래 못한다고 손사래만 치고 아무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 좀! 하고 바랐지만 오래 다니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돼서 매번 선생님 시선은 나는 건너뛰기일 수였다 몇 번 망설이다 어느 날 크게 용기 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노래자랑이 아닌 공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치면 음치는 약한 표현으로 거의 괴성이지만 반주가 받쳐주고 다 같이 따라 불러주는데? 생각하면서.... 그 뒤부터 내가 나가서 부르고 나면 멈칫멈칫 하나둘 손들고 나가서 부르게 됐고 그래도 언제나 첫 번째는 나였어서 선생님이 "맹ㅇㅇ 어머님은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젤 먼저 나와서 망가지는 걸 망설이지 않으신다" 고 칭찬인지 비꼬는지를 하셨는데 웃으며 말하시니 칭찬이라고 생각되었다 또 소형 녹음기를 구입 수업을 녹음해서 버스 안에서는 물론 집안일할 때도 들어서 가성비를 최대치로 높였다 나의 불행했던 시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 얼마나 좋았었던지 그때의 감질나던 팝송을 돈 들여 학원 가서 배우고 있는 나의 이 호사가 귀중해서 듣고 또 듣고 외우고 또 외우고 발음정도는 하다보면 나아진다며 즐겁게 흥얼흥얼! 팝송을 외우고 있는 내가 또 얼마나 멋지던지 스스로에게 취해서 행복했다 덕분에 지금도 나이에 비해 흘러간 팝송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테잎을 사서 외우다가 영역을 넓혀 실습삼아 노래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혼자 서 노래방을 찾아가 한 시간씩 연습을 했는데 항상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더구나 드나들 때마다 보는 사람은 없나 살피게 되고 돈 때문에 도 자주 갈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대학생 딸이 "엄마 우리 학교 앞에 가면 노래방이 많아서 거의가 다 한 시간 돈만 내면 무제한으로 부를수 있어" "리얼리? 당장 가야지!" 이웃사는 친구를 꼬셔서 찐 감자 몇 알과 참외 하나 챙겨서 한 시간 이상 전철을 타고 찾아가서 거의 네 시간동안을 맘껏 부르고 나왔더니 노래방 사장님이 놀라셨던 일도 있었다 동시에 영어 회화도 ebs tv로 이보영 선생님 아이쟉 선생님 문단열 선생님 외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를 꼭꼭 챙겨 들으며 열심히 따라갔다 그리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 이제는 ebs 라디오를 통해 영어를 듣고 있다 라디오는 운동 중에도 집안 일하면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보물이 됐다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대체) 돈 내라고도 왜 듣냐고 따지지도 않으니 새벽 5시 40분부터 시작 20분 간격으로 김대균의 토익부터 이지 라이팅 귀가 트이는 영어 입이 트이는 영어까지 계속해서 듣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김대균 선생님 유진 선생님 이현석 선생님 들과 나 혼자 무척 친하다 아니 친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교재는 그중에서 공부할 내용이 제일 가벼운 이지 라이팅만 주욱 정기 구독 했다가 이제는 '그것마저도 노인, 나에게는 무겁다 노인에 맞게 가볍게 가자'로 정하고 모두 귀로만 듣고 있다. 젊어서 처럼 배우겠다는 욕심은 버렸고 까먹는 속도라도 줄이자는 마음에서 다 덕분에 자신감도 생기고 학벌에 대한 열등감 은 깨끗이 극복했다 오히려 대졸 노인보다 훨씬 유식 해졌다 는 자만까지 하면서 살고 있다. 왜냐면 영어 강의가 다양한 상식과 영미권 나라들의 문화 현재의 지구촌 소식까지 풀어서 다루기 때문이다 수업내용 중 어떤 책이 언급되면 메모했다 동네 도서관에 가서 꼭꼭 빌려보고 영화에 대해서 언급되면 TV에서 검색해서 찾아서 보고. 배우가 연기를 잘하거나 잘생겼으면 출연진도 찾아서 이름도 외우고.... 그러느라 나의 노년은 항상 바쁘다. 배운다는 것 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중년였던 사십 대부터 폭싹 삭은 노년 지금까지 같이 가고 있는 영어공부가 나에게 영원히 같이 할 친구이고 반려이다. 요즘은 길에서 외국인을 보면 나에게 말 좀 걸어주지 하는 맘까지도 생긴다 최근에 연락이 닿아 소통하게 된 돈 좀 벌었다는 친구에게 영어 배운다 했더니 대뜸 "영어 배워서 얻다 써먹게 야?" 했다 그래! 너는 평생을 돈을 좇았고 나는 평생을 한 맺힌 지식을 좇았다 너는 내가 한심해 보이겠지만 나는 내가 무한 자랑스럽단다. 우린 둘 다 참 잘 살았고 성공했구나? 생각했다 나의 자존감을 우뚝 서게 해 준 영어공부 내 머리가 돌아가는 동안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젊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고 지금까지 몸도 가벼워 동네 주민들에게 건강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역시 머리를 쓰면 몸도 건강해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물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지만??? 내일도 새벽 5시 40분 김대균 토익으로 하루를 열 것이다 배움과 함께한 나의 생활은 항상 활기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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