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글짓기

9-14일 93강 나의 일(work)한토막9-15일 94강 우리집96강 추석추억

와인세대(맹언니) 2015. 9. 14. 21:06

추석 에 대한 추억.

어릴적 추석은 가슴 설레임 으로 가득했다.

뒷 마당에 있는 단감도 추석날을 위해 눈 으로만 먹어야 했고

새로산 신발도 추석때 까지 선반에 모셔두는 보물 였다.

추석 이 가까워 지면 큰성님 은 장터 비단 점에서

외상(고추나 참깨 팔아 주겠다고 약속)으로 끊어온

형형 색색 인조견 옷감으로 며칠씩 재봉틀 앞에 앉아

우리들 추석빔을 만들었다.


우리 큰성님(올케) 은 부엌일이나 들일을  무척 싫어해서

밥 먹고 나면 화장실로 달려 갔다 끝나면 나오거나 밥할 시간이면

갑자기 재봉틀 앞에 앉곤 해서 언니들과 자주 다투곤 했는데

그때 마다 언니들이 어른들 한테 혼나곤 했다.


내 추석 빔으로는 주로 빨강 치마에 색동 저고리 아님 노랑 저고리 였다.

가끔은 배자까지 곁들일 때도 있었고 그때는 어른들이 더 행복해 하셨다.

색동 저고리는 색깔 별로 감을 사서 일일이 손으로

짤라 붙여 만드는 고급 옷에 속했다.

추석이 다가오면 돼지를 잡는등 온동네가 들떠 있었고

우리 집에서는 머슴이 닭을 잡아 털을 뜯었다.

여자들은 분주 하게 떡방아를 찧였다.

쌀을 불려 절구에 빻아서 채로 치고 위로  걸리는 무거리 들을 모아서

또다시 찧고 그렇게 복잡한 단계를 몇 번씩 거쳐서야 비로소 고운 떡가루가 완성 됬었다

완성된  쌀가루에는 사카린 몇알을 물에 타 섞어서 시루에 쪘는데

사카린은 당원으로 설탕으로 점차 고급화 됬다.

떡고물은 양애 잎 이라는 바나나 잎처럼 생긴 식물 의 잎을 사용 쩍(경계)을 만들었다.

난 지금도 양애잎 냄새가 그립다.

고향 떠난후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석 당일 식전 이면 마당과 텃밭을 갈르는 울타리에 울긋불긋 고운 옷들을

 펼쳐 널어 촉촉하게 이슬을  맞힌후 손잡이가 길게 달린 대접 같은 무쇠 다리미에

빨갛게 이글대는 숫불을 담아 우리들은 위에서 붙잡고 어른들은

아래에서 서 한쪽끝은 두발로 한쪽끝은 왼손으로 붙잡고 다림질을 했다.


아침 밥으로  햇 쌀밥 에 고깃국을 먹고 나면

우리 막둥이 부대 친구들은   곤옷으로 갈아입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행자야!혜자야! 신자야! 시미꼬야!복구야! 불러 모아 서로 서로

옷 매무새도 비교해 보며 떼로 몰려다녔다.

그러나 주로 동네 끄트머리 에 사는 빈농집 친구들은

무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었고

기가 죽어 있었던 생각이난다. 특히 딸만 줄줄이 낳아 딸부자인 금자

자매는 추석날 에도 여동생 애기를 업고 나타나곤 했다

그때의 친구들로는 단순이 오덕이 상심이 기밀이 등이 생각난다.


동네 뒤에는 뒷뚱 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어

뽈치기 (지금의 야구)나 배구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 주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추석날 밤에는 뒷 방죽  과 배진강 이라는

큰 방죽을  두개나 거쳐야하는  오릿길 학교 운동장 에서

 주변 여러 동네 큰애기 (처녀) 들이 모여 강강 수얼래를 했는데 

 축에 못낀 우리들은 뒤에 서서 구경하다가

길게 땋아 댕기로 묶여 치렁대는 머리만 골라 질끈 잡아당기고 도망쳐서

멀찌기 도열해 서있는 코스모스 밭으로 달려가  숨어 키득 거렸던 기억들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금은 추석하면 신문이 안오고 세상이 멈춘 듯 답답한 연휴로 만 생각되서

옛날의 추석 풍경이 그리워 질뿐이다.



94강 나의 집

우리집 은 뒷뜰이 자랑꺼리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 특히 벚꽃이 일품이다

여름이면 분수가 시원 하게 뿜어져 나오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잎 들이 요란스레 휘날린다

드넓은 잔디밭도 있다.

내 손으로 돌봐 주지 않아도 잘도 크고 피고 진다


뒷 뜰 저쪽  너머 로는 멀리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국기봉에서는 휘날리는 국기도 보인다

비온 뒤에는 팔을 벌리면 잡힐 듯 가깝다.

나는 부엌일을 할때면 항상 뒷뜰의 자연과 관악산의 바위를 쳐다본다.

주거하는 공간은 아담한 세칸짜리 에 불과 하지만 뒷뜰이 넓어 부자다.

나는  우리 뒷뜰이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중앙공원 이라 부른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면 어떤가 내가 내것이라 느끼고 누리면 되는거지.

25층 건물의 21층에 위치한 32평 짜리 내 아파트가 거대한 아름다운 정원을

거느리고 있어서 전에 살던 어떤 큰 집들 보다 나는 이집을 좋아한다.



93강 나의 일

결혼초기 개인 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직장은 나에게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했다.

이것저것 자영업을 하며 고생하는 고장 오빠 또한 항상 걸리던 차에

나는 자본을 오빠와 올케는 장사를하기로

불광동 도로변 새건물 2층에 청궁이란 중국집을 열었다.

 그 동네에는  아주 작은 중국집 하나 뿐였기에 희망을 갖고

개업을 했었고 나는 우아하게 카운터에 앉아 돈만 받으면 되는줄알았다.

우리는 너무 순진했고. 나는 계산이 서툴러 돈을 내밀면

덜덜 떨면서 틀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돈받는 것이 뭔지 모르게

미안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항상 틀렸다.

지금도 생각 나는 손님으로

처녀때 우리 건물에 삼실을 갖고 있던 금강개발 사장 (그때는 실업상태였다 후에 명성콘도 회장)

이 친척들까지 이끌고 와서 폼나게  먹었는데

내 계산 착오로  덜 받은 사건이다.

얼마나 많이 덜 받았던지 며칠동안 속 상했던  기억이 난다.

배달과 주방장 은 순진한 쥔들을  곤조라는 것을 휘둘러 골탕을 먹였다.

손님이 없으면 괴로웠고 많이오면 기다리게 하는게 미안해서 또 괴로웠다.

배달이 밀리면 내가 200원 짜리 짜장면 하나라도 배달통을 들고 달려가야 했다

날마다 출근 할땐 울고 싶었고 이것이  꿈였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 들처럼 부러웠다.

오빠가 가끔 신경통으로 배달통을 들고 절뚝거리고 걸을때는

내 가슴이 미여지듯 아팠다.

난 어려서부터 고생하는 오빠를 볼때마다  가슴 아퍼했다.


그때 생각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나는 어느정도로 계산에 어둡냐면 1500원 짜리 배를 

세 개에 5.000원에 달라고 사정해서 사온 정도의 멍텅구리이다.

평생 아파트 분양한번 못받아본 철저하게 국문과 타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