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글짓기

9.10일 89강 내 부모에 대해서.와90강 형제 자매이야기. 91강 글쓰기후기

와인세대(맹언니) 2015. 9. 11. 20:44

백일 글쓰기 도전기.

백일동안을 원고지 5장 정도 매일 한 개씩 백개의 글을 써야 하는

상당히 무리해 보이는 목표 백일이 눈앞으로 껑충 다가왔다.

낙오 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는 성취감에 나 스스로 자랑스럽다.

또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당당하게 자랑한다


살아온 세월 덕분에 나에게 글감은 풍부했다.

그러나 많은 기억들을 순서대로 무리없이

나열 해 나가는 기술이 나에겐 없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 했지만 한번도 제대로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많은 추억들이 한꺼번에 나도 나도하며 아우성을 치며 

동시에 튀여 나와  많은걸 쓰고 싶은 욕망과 도 싸워야 했다.

백일 동안을 꾸준히 쓰며 지도받아온

지금은 전보다는 차분히 정리할수 있는 안정감이 생긴것같다.

또한 꽁꽁 숨어있던 기억들이 한가지 추억으로 인해

고구마 줄기처럼 주렁 주렁 딸려 나오는 것도 경험했다.

그리고 놀라고 있다.

기억창고 속에 이렇게 많은 기억들이 잠자고 있을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시간이 없었다면 영원히 빚보지 못할 귀중한 추억들이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하나씩 희미하게 떠올랐다  점점 뚜렷하게

어제인양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와

글로 씌여지는 순간 보석처럼 빚났다.

그로인해 나의 지나온 삶이 아름다웠다고 칭찬 해주는 계기도 되줬다.

지식 전달자 로서의 시골출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부끄러운 질문도 쉽게 할수 있는 편한 분위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90강 형제 자매  이야기를 나의 건강비법으로...

나에게 건강 비법이란 특별히 없다.

단지 뭔가를 하면 다 재미지다. 젊어서 는 테니스가 재밌었다.

날마다 아침 9시 태극기 계양식 부터

6시  하강식 까지 테니스장에 있었다.

유치원 다니던 막내가 끝날 시간에 울었단다.

선생님이  물으니

지금 난 집에가면 암도 없어서 테니스 장으로 가야해요”라 했던 일도 있었고,

  테니스장이 큰딸  고등학교 길목에 있어서 하교 시간에 가끔 보게되 친구 들한테   창피해 하기도 했다.

어느날

엄마 떽볕에서  땀 뻘뻘 흘리며 머슴 처럼 퉁퉁하고 시커먼 허벅지를 

내놓고 뛰여다니는것  말고 꽃꽂이 나 요리 같은 정적인것  하면 안돼?

하며 진지하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방학 때만 되면 애들을 끌고 테니스장으로 데려가

레쓴을 시켰다.

특히 초등에서, 중학,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 삼개월이란 기간이

귀중해서  남들은 학원 으로 돌릴 때 난 테니스장으로 끌었었다.

내가 해보니 어려서부터 배운게 최고더라 늦게 시작하면 해도해도 안돼.

느들이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 할거야해가며...

(원래는 초등학교 다닐 때 나랑 셋이 배웠다가 진학하면서 방학때만,)

 

어느날은   동네 약국에서 내게

병원함 가보세요. 너무 까맣고 말르셨어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니스장 사장도 여자가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야지

맹사모님은 시도때도 없이 들어갔어요라 했다.

그만큼  난 말라있었다.

한겨울과  한여름철 테니스 레쓴은 극기훈련이다.

겨울엔 공이  얼어있어  잘 튀지도 않았고  콧구멍에서 코가 얼어서 뻗뻗했다.

여름엔 떽볕에서

코치가  쉴새없이  던져주는 공을  계속  받아 쳐야 해서

숨이 턱에  콱콱 차 올랐다.

남편이 출근 하면서 묻는다."오늘 덥다는데 그래도 나가요?"

"당근"

" 차암 어렵게 사요"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여 남편한테 테니스 라켓 줄까지 잘리는 수모를 겪고야 말았다.

화가난 남편이 가방에서 라켓 두 개 (공 치다 줄끊어질것에 대비 똑같은 라켓 두 개 지참이 필수)

를 꺼내 내 눈앞에서 가위로 싹뚝 싹뚝 잘르는 것이였다.

여가로 테니스 치랬지 여가로 살림 하랬어? 아침부터

츄리닝을 입고 밥을 해요.‘얼른 먹고 나가라이거아냐?

이번엔 줄이지만 담번엔 라켓을 부러트릴거야

라며 씩씩댔다.

원래 자기가  치면서   권했지만 이렇게 빠질줄 몰랐을 것이다.

그날(일요일) 아침 난 큰 불행에 빠져 코를 팅팅 풀어대며  눈물 찔끔 콧물찔끔 

짜고  있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화했어?”

아니 나 전화할 기분 아냐.세상에 내말좀 들어봐라

이런 야만적인 남자가 어딨니? 현경이   남편봐

마눌  테니스 만  잘 치라 며  와서 밥도 사주잖아 또 황정순 남편은 어떻고?“

하며 자초지종 애기했더니

!! 느 남편 심한것도 비정상도 아냐 우리가 심했지. 그러지 말고

얼른 줄이나 매야  낼부터 당장 치지

그말 듣고 나니 금방까지 쪼잔하던 남편이 보통으로 보였고

조금 미안하기 까지 했다.

벌떡 인나서 남편 커피를 타서 들고

 “자 커피” 하며,

변기위에 앉아있는 남편에게 드리밀었다.


남편이 내얼굴을 쓰윽 쳐다보니 둘이 둥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는  여보 라켓 줄 어디서 매야하지?”

응 전번 맸던 스포츠에 전화해서 가져가라해

그리하여 다시 평화를 되찾아 테니스를 위한 삶이 계속 됬었고

그담은 탁구 자전거 수영 그렇게 뭐든 열심히 철없이 재밌게 살았던 것이

지금까지 건강을 지킨 비법인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쳤지만  A조는 커녕  B조도 못올라가고

C 조로 졸업했다


 제 89강 나의 어버지 와 어머님에 대한 추억.

먼저 엄마 기억부터

언니랑 나는 엄마 젓꼭지 만지기를 좋아해

틈만 나면 다퉈가며 만졌다 특히 차가울 때가 좋다.

전에는 고장 오빠랑 언니가 다투다가 내가 태어나고 바뀌었다 했다

엄마는 항상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셨는데 다녀오신 후의 젓꼭지는

차가워서 최고 의 감촉였다.

한쪽 만져서 따듯해지면

반대쪽 만지고 다시 따듯해지면 아껴놨던 반대쪽 만지고,

그러다 어느날 엄마로 부터 정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서야 떨어졌다.

너도 젓 생겼잖아 니껏만져라하시며 밀어내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작난감은 엄마 의 뱃가죽였다.

애를 많이낳아 늘어질대로 늘어진 주름 투성이 엄마 뱃가죽으로

살강(부엌찬장)을 만들어 그릇 싯어 엎어야 한다고

뱃가죽을 당겨서 판판하게 늘궜다 놨다 하면서 갖고 놀았다.

중학생이던 어느날 친구집 에서 친구 엄마의 팽팽한 뱃가죽을 봤을 때 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친구가 불쌍했다.

'저런 뱃가죽은 징그러워서 엄마 같지가 않을텐데 제는 무슨 정이 있을까'하고...

내 생각에는 엄마들의 뱃가죽은 저렇게 팽팽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건 내 올케의 뱃가죽이 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친구는 큰 딸였고 내 큰 올케는 내가 태어 날 때부터

성님(올케)으로 존재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뱃가죽도 풍부했지만 목주변이 움푹 파여서 우리가 우물이라 고

 만저보곤 했는데 어느 여름날 밭매고 와서  잠시 눈붙이  

엄마 목 우물에 언니가 물을 퍼다 부었다가 혼찌검이 난적도 있었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으로는

어느날 우체부 아저씨가 엄마한테

할머니 편지 왔어요하는거였다.

왜 울 엄니를 할머니라고 해요?” 하며 엄청 화냈던  생각이 난다.

엄마는 항상 내가 엄니~~”라고 부를 때 오여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나를 내강아지,내새끼라 부르며 엉덩이를 두들겨 주셨다.

엄마는 95세 까지 장수하시고 주무시다 그대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두 개로 뚜렷이 나뉜다.

아주 어렸을때와 장례식때로.

내가 6살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난 지앙 스러웠다(번잡스럽단 사투리)

온갖 잡동사니 들을 됫박만한 큰방으로 끌여들어 방을 난장판을 만들었었다.

어느날 머슴이 퇴비를 밭으로 옮겨 나르는데 바지게 에 퇴비를 그득히 싣고는

작대기에 의지해서 일어 나야 하는데 아까 있었던 작대기가 없더란다.

그 누가 퇴비 투성이 작대기가 방안에 있으리라 상상했겠는가.

그러는 나에게 아버지가 옹댕이(새끼로 만든 광주리)를 들여놔 주며

다 놀고나서는 여기다 모아라하셨던 기억과

무슨 일로였는지 아부지 한테 혼나고 펑펑 울다가 코를 했더니

코 구멍에 코풍선이 달리는 거였다.

  신기해서 아부지 이거봐하고 드리댔던 기억도 난다.

그때 아버지는

? 드럽다 이리와 닦자하셨다.

또하나는 장로님이나 되서 담배를 못끊는다고 엄마랑 자주 싸우셨던 기억도있다.


그담은 장례식 기억이다.

병풍 뒤에 모셔두고 엄마가 울면서 아버지 얼굴을 쓰다듬고 나오시는거였다.

나도 똑같이 울며 얼굴을 만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모두들 노란 삼배로 상복을 입었는데 나만 안 해 주는거였다.

억울해서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졸라 기어이 밤중에 재봉틀 옆에 지켜 앉아

이모가 만들어준 상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돌아다녔다.

담날 아침에는  우리집이 잔치집으로 벅적대는 것이 보통 신나는 일이 아니였다

대문에 버티고 서서 동네 아그들을 선별해서 입장 시키고 미운 애들은

못오게 철저히 막았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일이 생겼다.

바로앞집  외사촌 동갑내기 여자애가 자기 엄마 뒤에 따라오는거였다.

나는 눈으로 흘기고 오지 말라는 신호를 무차별 적으로 보냈지만

모른척 하고 엄마 치맛자락 붙잡고 홀랑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다시 끌어낼수도 없고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사(상여앞에 작대기에 매달고 나가는 깃발같은 것)가 많았던

기억도 난다. 작은 오빠가 병영중학교 교장 였을때라 어른 중학생들

(국민학교 졸업후 농사만 짓다가 중학교가 생겨 입학한) 이랑

학교 설립시 동참했던 독지가들이 많이 참석해서 라는 사실은

철들어서야 알게됬다.

나는 아부지가 더 사셨음 아마도 동생이 둘은 더생겼을거라고

엄마를 놀려 드리곤 했다.